스타트업 투자 계약에서 ‘자금 사용 제한 조항’ 협상
스타트업이 외부 투자를 유치할 때, 투자자는 흔히 투자금이 특정 목적에만 사용되도록 요구하는 자금 사용 제한 조항을 계약서에 삽입한다. 이는 투자자가 자금 회수의 안정성을 높이는 일종의 보호장치이지만, 창업자가 제한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자금 활용의 유연성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예전에 만났던 한 스타트업 창업자는, 초기에 계약서 검토를 대충 했다가 “연구개발(R&D)에 전체 투자금의 50% 이상을 반드시 쓰라”는 조건을 뒤늦게 발견했다. 이후 시장 변화로 마케팅 비용을 늘릴 필요가 생겼는데, 이미 계약된 제한 조항 때문에 빠른 대응이 불가능했고, 결국 경쟁 업체에 비해 출시 타이밍이 늦어지는 바람에 타격을 입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자금 사용 제한 조항을 어떻게 협상하고, 창업자가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전략을 정리한다.
1. 투자계약서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자금 사용 제한 조항
투자자가 제시하는 자금 사용 제한 조항은 기본적으로 투자금을 특정 용도나 항목에 국한함으로써 투자 리스크를 줄이려는 목적을 갖는다. 가장 흔한 유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특정 용도 지정
투자금이 마케팅, 인력 채용, 연구개발 등 특정 범위에만 쓰이도록 못 박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전체 투자금 중 60% 이상은 마케팅 비용에 사용해야 한다”는 식이다. - 사전 승인 필요
창업자가 다른 용도로 자금을 사용하려면 투자자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하는 구조다. 이렇게 되면 창업자는 일상적인 예산 항목까지도 승인 과정을 거쳐야 해 대응 속도가 떨어진다. - 사용 내역 보고 의무
투자자에게 정기적으로 자금 사용 내역을 제출하거나, 지정된 회계법인이 이를 감시하도록 하는 조항이다. 창업자는 별도의 문서 작업과 실사(Audit)를 준비해야 해 부담이 커진다.
유의점
- 제한이 지나치게 엄격하면 창업자가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기회를 잡지 못할 수 있다.
- 투자자는 합리적 보호장치를 원하지만, 창업자가 제대로 협상하지 못하면 장기적 성장에도 제동이 걸린다.
2. 자금 사용 항목별 제한 조항이 초래하는 문제
스타트업 운영에는 다양한 비용 항목이 존재한다. 그러나 투자자는 비용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창업자의 의사결정 여지를 좁히려 할 수 있다. 예컨데 다음과 같은 항목이 제한 대상이 되기 쉽다.
- 마케팅 비용: 광고나 홍보비가 과도하다고 생각하면 투자자가 집행을 승인하지 않을 수 있다.
- 급여 및 인건비: 창업자를 포함한 임직원의 보수를 제한해 과도한 인건비 지출을 통제하려고 한다.
- 운영비: 임대료, 물류비, 법률 자문비 등 일상 경비에도 제한이 걸리면 신속한 의사결정이 어려워진다.
유의점
- 수익화 모델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한 조항 때문에 원하는 시점에 인재를 채용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 마케팅 예산 확보가 어려워져 사용자 유입과 매출 성장에도 지장이 생긴다.
3. 투자자 보호 vs. 스타트업 자율성: 이해관계 조율의 중요성
투자금 사용 제한 조항은 투자자가 자금을 투자하는 대가로 안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실제로 일부 투자자는 창업자가 사치성 경비나 개인 목적에 자금을 쓰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러한 제한을 걸고 싶어 한다. 반면 창업자는 자율적으로 예산을 편성해 시장 기회를 잡고, 예상치 못한 리스크에도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 투자자 관점: 자금이 낭비되거나 창업자가 지나치게 높은 보수를 가져가는 사태를 예방하고자 한다.
- 창업자 관점: 장기적인 시장 변화와 성장 전략에 맞춰 자금을 재배분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4. 유연한 자금 운용을 위한 협상 전략
자금 사용 제한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지만, 협상을 통해 다음과 같은 조건을 확보하면 상대적으로 유연성을 높일 수 있다.
- 포괄적인 사용 목적을 명시
“운영 자금” 또는 “성장 관련 투자” 등으로 용도를 폭넓게 설정하면, 창업자가 세부 항목을 재량껏 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케팅, 연구개발, 인프라 개선, 인력 채용, 기타 운영” 등 항목을 미리 포함해두면 예산 편성이 쉬워진다. - 사전 승인 절차 간소화
자금 사용 시 매번 투자자 서면 동의를 받도록 돼 있으면 운영 효율이 떨어진다. 일정 금액 이하의 지출은 창업자가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그 이상이면 투자자에게 보고하도록 기준액을 설정하는 식으로 협상할 수 있다. - 사후 보고 방식 채택
사전 승인 대신, 일정 주기(예: 분기별)로 사용 내역을 공유하는 방식이 훨씬 유연하다. 투자자는 사후 검토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하고, 창업자는 의사결정 속도를 유지한다. - 실사(Audit) 범위 제한
투자자가 회계법인을 통해 매월 자금 흐름을 감시하도록 하는 식이면 과도한 부담이 생긴다. 연 1회 또는 반기 1회 정기 실사, 혹은 특정 사건(예: 대규모 자금 조달) 발생 시 제한적으로 실시하도록 합의하면 된다.
5. 실제 사례: 자금 사용 제한으로 성장 타이밍을 놓친 스타트업
내가 예전에 접한 한 스타트업은 시리즈 A에서 받은 투자금 중 70% 이상을 연구개발에 써야 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그대로 수용했다. 당시엔 R&D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시장 상황이 바뀌어 해외 마케팅과 현지화 작업에 투자금을 더 써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이미 체결된 계약서에는 사전에 정해진 비율이 있어, 투자자 동의 없이는 자금 비중 조절이 불가능했다. 결국 R&D에만 돈을 쏟아붓는 중에 경쟁사가 빠르게 해외 시장을 선점했고, 해당 스타트업은 뒤늦게 마케팅 예산을 늘리려다 시기를 놓쳤다.
이런 경우를 보면, 자금 운용의 융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게 된다. 시장 상황은 하루아침에도 변할 수 있고, 스타트업은 종종 예상치 못한 기회를 잡아야 하는데, 제약이 심한 조항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
6. 협상 시 명심해야 할 핵심 포인트
- 자금 사용 목적을 크게 묶어서 규정하기
“성장 전략 실행에 필요한 운영 비용” 같은 표현으로 용도를 광범위하게 설정하면, 세부 항목에 얽매이지 않는다. - 사전 승인 대신 사후 보고 방식 채택
일정 한도를 넘는 비용만 보고하거나, 분기별 혹은 반기별 보고로 대체해 창업자의 의사결정 속도를 지킨다. - 회계 감사나 실사 범위를 구체화
무제한적인 감시는 스타트업에 부담을 준다. 실사 횟수, 보고 형식 등을 사전에 논의해 보안과 효율의 균형을 잡는다. - 인력 채용과 보수 제한 협상
고급 인재를 영입해야 하는 시점에 급여 제한이 발목을 잡지 않도록, 특정 보수 범위까지는 창업자의 재량에 맡기는 방안이 필요하다. - 추가 투자 라운드 대비
자금 사용 제한이 후속 투자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면, 더욱 심각한 제약으로 이어진다. “해당 조항은 본 라운드에만 한정된다”는 식으로 명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스타트업이 자금 운용 자유를 확보해야 성장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자금 사용 제한 조항은 투자자의 관점에서 합리적인 요구처럼 보이지만, 창업자가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협상하지 않으면 경영자율성이 지나치게 훼손될 수 있다. 결국 이 문제는 단순히 “투자금을 어디에 쓸 것인가”에 그치지 않고, 회사가 민첩하게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의 문제로 연결된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유연성이 떨어진 스타트업은 갑작스러운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좋은 기회를 놓칠 때가 많았다.
투자계약서 협상 과정에서 창업자는 자금 사용 목적을 폭넓게 설정하고, 사후 보고 중심으로 절차를 설계하며, 실사 범위를 적정 선에서 제한해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 이런 협상을 통해 창업자는 성장 전략을 구사할 여유를 확보하고, 자금운용전략을 주도적으로 펼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며 VC투자를 받은 의미를 극대화할 수 있고, 투자자 역시 합리적 수준의 투명성과 안정성을 보장받게 된다.